본문 바로가기
대한민국/경상도

경남 김해여행 - 인도공주에서 금관가야의 국모였던 <허황옥> : 수로왕비릉

by 러블리 앨리스, 호텔&여행 블로거 2014. 10. 21.
728x90
반응형

Trip for Gimhae : Royal Tomb of Queen Suro (8G)

She was princess of Ayuta in India who married King Suro, the founder of Garak nationm in 48AD 국내김해여행 - 수로왕비릉


국내김해여행 - 수로왕비릉



김수로의 왕비로 알려진 그녀의 이름은 <허황옥>


2014년 9월 여행입니다.

인도에서 왔다는 그녀의 이야기는 김해사람이라면 아마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금관가야의 시조인 수로왕의 왕비이자, 여자로서 최초로 아들에게 자신의 성씨를 물려준 여인이기도 하고요, 부부로서의 평등한 위치에서 서로를 위하려고 노력했던 왕비이기도 했던, 먼 바다를 건너 최초의 국제결혼으로 기록된, 그녀는 지금 후대에게 진취적인 여성으로 알려져있죠.


현재, 김해에는 수로왕릉과 더불어서 수로왕비릉이 잘 보존되어있는데요, 그 곳으로 가기로 선택한 길은, 국립박물관 뒷쪽에 있는 구지봉이 있는 길을 거쳐서 이동했습니다. 그냥 정문으로 가지 않고 이렇게 뒷문으로 가게 된 이유는, 워낙 더웠던 날씨에 햇빛을 피하며, 시원한 나무 그늘을 느끼며 걷기에 좋기도 했지만, 현재 김해시의 대표차(茶)인 장군차 나무를 만나기 위해서이기도 했지요.






큰지도보기

수로왕비릉 / 문화유적

주소
경남 김해시 구산동 산 80-1번지
전화
055-330-3924
설명
왕비릉(王妃陵-국가사적 제 74호)의 숭신각(신도비각)은 가락국 역...



국내김해여행 - 수로왕비릉



위 지도에서 제가 첨부한 사진을 보시면 제가 걸어갔던 길(파란색 선)을 표시해두었는데요, 정문의 주차장이 있는 곳이 아닌 옆길로 걸어왔습니다. 이미 앞서 언급한대로 제가 표시한 길로 (구지봉을 거쳐서 걸어오시면) 걸어가면, 수로왕비릉으로 가는 길이 나오는데요. 그 길을 따라가다보면 의미있는 나무들이 길을 따라 심어져있는 것을 볼 수 있어요.






국내김해여행 - 수로왕비릉



생각했던 것보다 워낙 뜨거웠던 9월의 마지막 주, 햇빛이 정말 어마어마했는데요, 1박2일 동안 여행하면서 저는 생각보다 많이 얼굴이 탔을 정도로 햇볕이 강했던 가을이었습니다. 마냥 시원한 나무 그늘아래를 걸으면서 좋다~ 역시 나무가 좋아~ 이렇게 룰루랄라~ 하며 걸어가고 있었는데, 문화해설사님께서 " 우리 잠깐만 멈춰서볼까요?" 라고 말씀을 꺼내주시더라고요. 일동 STOP!






국내김해여행 - 수로왕비릉



그렇게 가던 길을 잠깐 멈춰서고나서 문화해설사님의 설명을 들을 수 있었는데요, 한 때 대한민국에서 품절현상까지 일으켰던, 장군차는 지금 사진에서 보이는대로, 길가에 심어져있습니다. (위성지도의 3번째 장군차나무가 있는 곳)


이 장군차는 허황옥 공주가 최초로 한국으로 들여왔는데요, 이 장군차는 일반차와 달리 그 모양새도 다르지만, 우리가 가장 널리 마시는 녹차와는 방식이 다릅니다. 장군찻잎을 완전히 발효시켜 발효차의 형태로 가공하여 특화된 차인지라, 독특한 차향과 약간의 달콤한 감칠 맛이 돋보이는 상품이고 무엇보다도 고혈압에 매우 좋다고 하여서 고혈압 환자분들이 많이 마신다고 해요 


그런 장군차의 시초가 되어준 봉차를 가지고 온 허황옥 공주를 상징화하여, 이렇게 구지봉에서 수로왕비릉으로 내려가는 길가에 양쪽으로 장군차나무를 심어두었더라고요.







국내김해여행 - 수로왕비릉



흔히 쉽게 떠올리게되는 찻잎과는 많이 달랐다.


가만히 보시면, 찻잎이 매우 두껍죠? 우리에게 가장 친숙하고 많이 알려진 녹차나 홍차를 득음할 때 가만히 보면 그 찻잎은 매우 얇고 여린것이 특징이었지만 장군차는 그런 외부적인 찻잎의 모습을 떠올리기에는 그 모습이 많이 달랐습니다. 물론 실제 찻잎으로 사용하는 장군차나무의 잎은 지금 사진보다는 조금 더 작고 여리긴 합니다만, 그렇지만 다른 찻잎에 비하면 조금은 두꺼운 것이 특징이죠.


차를 가공하는 과정에서 이 장군찿잎들이 공기와 접촉하게 되면 짙은 갈색,흑색,홍색 으로 변하는 하는 물질들이 다른 차 종류에 비해 발효가 완숙하게 되도록 만듭니다. 그러므로 발효차를 우려냈을 때 그 수(水)색이 독특하며 떫은맛(발효차의 고유의맛)을 내는데 그냥 떫다기보다는 독특한 맛이라고 해요. 물론 이 맛 부분은 호불호가 갈리겠지만요 ^^


문화해설사님의 설명을 듣고 나니 걷다가 만나게 된 이 작은나무들. 평범한 나무가 아니었습죠~ 그래서 시원한 그늘아래 나무를 꼼꼼히 들여다보며, 수로왕비릉으로 더 가까이 살랑살랑 걸어가봅니다.










국내김해여행 - 수로왕비릉



저~기 왼쪽에 보이는 초록색 대지. 저기가 허황옥 공주가 묻어있는 곳이고요, 그 길로 가는 길에 작은 터널위로 저는 걸어갔습니다. 


이 터널은 원래 이렇게 터널이 아닌, 작은 동산? 산? 암튼 그러했는데, 영험한 기운이 흐르는 곳이라고 하여 일제 강점기 시대때, 당시 일본인들이 맥을 끊어놓겠다하여 이 곳을 완전히 끊어놓았다고 해요. 시간이 흐르고나서 김해시에는 이 부분이 완전히 도로화되어버려서, 어떻게 연결할까 고민하다가, 이미 도로로 만들어놓은 것을 봉쇄하지 않고 이렇게 터널 형태로 뒷 부분을 연결해서 이어놓음으로 한 시름 달랬다고 하죠. 


제가 표시한 위성지도의 2번 부분입니다.






국내김해여행 - 수로왕비릉



도착완료!





국내김해여행 - 수로왕비릉



사실 화려하지 않은, 넓은 큰 릉이었던 수로왕비릉 


인조 25년에 만들어서 세운 묘비인데, 이 묘비명에 적인 의미로 인해서 사실, 허황옥 왕비의 출신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다고 합니다. 인도 출신이다. 아니다 중국 출신이다. 이렇게 갈리기도 하는데요, 문제의 단어는 <보주>라는 단어로 인해서 발생한 문제제기였죠.


그래서 이 부분에 대해서도 뉴스를 찾아보니, <한양대 명예교수이신 김병모 교수님의 말에 따르면> " 허황옥은 몰락한 아유타 왕국의 후손이고, 그들이 정착한 곳이 중국 보주, 현 쓰촨성 안웨현(安岳縣)"이라는 견해를 가질 수 있다고 합니다. "보주"는 신어신앙을 가진 소수민족이 살았던 지역이거든요. 당시 허황옥의 선조들이 다스렸던 아유타 왕국이 정치적 상황에 문제가 생겨서 결국 왕국이 붕괴가 되었고, 그로 인해서 아유타왕국의 국민들은 난민으로 전락하게 되었다죠. 그래서 아유타왕국이 지배층이 보주 지역으로 흘러들었다는 것이 김병모 교수님의 견해입니다. 사실 이 설명을 들어보면 허황옥 공주의 출생에 대한 의문이 말끔히 정리가 되기에 이해하는 데 부족함이 없는 것 같아요!






국내김해여행 - 수로왕비릉



수로왕비릉에서 바라본 전경은 그녀의 소망을 담은 곳이었다. 


보시다시피 일반적인 땅보다는 상당히 높은 곳에 위치해있기에 죽어서도 저 멀리 내다볼 수 있고, 풍수지리학적으로 가장 좋은 기운이 몰려있는 곳이 지금 이 곳, 수로왕비릉인데요, 사실 이 좋은 땅은 금관가야의 시조인 <김수로왕>의 릉으로 점지해둔 곳이었습니다.


하긴, 그러보니 엄청 좋아요. 단지 무덤이 있고 주변을 정돈해서가 아니라, 릉 가까이 올라가서 정문쪽을 바라보면, 탁 틔인 시야가 좋더라고요. 그리고 원래 정문 방향으로는 과거에는 바로 바다가 있었기 때문에 실제 그 당시에는 더 좋은 전망권을 보장받았던 장소였다는 사실을 쉽게 추측할 수 있었다고 하고요. (현대에 와서는 땅이 메워져서 그 바다가 보이지 않지만요)


어린나이에 먼 타국으로 시집을 와, 평생을 부모형제를 보지 못하고 가야의 왕비로 살았던 그녀. 그런 그녀가 먼 바다를 향해서 그리운 가족을 달랠 수 있도록, 바다가 잘 보이는 곳으로 묻어달라고, 그리고 그냥 땅으로 묻히기에는 내 흔적이 사라지는 것 같으니, 나의 성씨를 물려받을 수 있도록 해달라는 그녀의 소원을 김수로왕은 그대로 들어주었다고 해요.


그래서 원래 한 나라의 왕의 릉으로 점지해둔 장소에 그녀를 묻어주었고, 2명의 아들에게 그녀의 성씨를 물려주게 되었죠. 실제 김해 허씨와 김해 김씨는 한 부모를 둔, 같은 형제자매인 셈이지요







국내김해여행 - 수로왕비릉




허황옥 그녀의 이야기에 빠질 수 없는 파사석탑


그녀가 먼 타국에서 가야로 올 때 타고왔던 배를 풍랑으로부터 무사히 지켜주었다는 파사석탑이 보존되어있는 곳입니다. 사진을 자세히 보시면 그물이 쳐져있는데, 이 그물의 목적은 제가 전에 경복궁에 대한 포스팅할 때 언급했던 부분이죠? (리뷰 : 서울여행 : 조선의 중심지, 경복궁 ① : 무료해설투어로 경복궁을 둘러보아요.) 이 파사석탑이 보존되어있는 곳이 높이가 높지 않아서 그물이 더 정확하게 잘 보입니다.






국내김해여행 - 수로왕비릉



신비의 돌 VS 과학의 힘? & 정말 인도에서 온 돌이긴 한 걸까? 


이 석탑을 허황옥 왕비가 인도에서 배를 타고 가야로 올 때 풍랑을 잠재울 수 있었다고 합니다. 과학적 근거를 따지자면, 이 돌로 인해서 배의 무게균형을 잡아주어 풍랑이 오더라도 균형감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라고 추측을 해봅니다 ^^ 현대의 선박들은 배의 균형을 잡아주는 밸러스트 탱크가 있는데, 이 파사석탑이 (지금은 석탑으로 쌓아졌지만, 당시에는 석탑이 아니고 단지 돌이었을 듯) 배의 아랫부분에서 균형을 잡아주었던 돌의 역할을 했을 것이라는 것이 과학적 근거이자 추측이기도 해요. 


하지만, 문헌으로 남아있는 기록은 아니기에, 구전으로 내려오는 풍랑을 잠재워주는 신비한 돌이라는 것이 가장 많이 알려져있죠 ^^






국내김해여행 - 수로왕비릉



사실 기록이라는 것이 거슬러 올라갈 수록 많이 남아있지는 않죠. 그러다보니 많은 부분에서는 그것을 증명할 길이 많이 없는데, 사실 이 파사석탑도 처음 알려졌을 때에는 실제 그랬을라고~ 그랬다고 합니다. 그녀가 인도에서 왔다는 것, 그래서 먼 바다를 건너서 김수로왕과 국제결혼하여 금관가야의 국모가 되었다는 것은, 그 시절 그러했듯이 미화하고 과장한 시조설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라고 그렇게들 생각했다가, 이 파사석탑이 돌의 출처가 너무나도 분명했기에, 허황옥 왕비의 출신이 인도라는 사실을 증명해주는 강력한 증거가 되어주었지요. 


남인도 언어인, 타밀어는 인도 15개 공용언어중 하나인데요 (와.. 공용어가 15개나 되는 나라네요!) 이 타밀어는 한국어와 유사한 발음과 그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데, 완전 신기했습니다. 대표적인 말로 엄마/아빠가 타밀어나 한국어나 의미도 소리도 완전 동일하다죠! 파사돌이라는 말도 타밀어와 일치하는 점이기도 하고요. 고대의 타밀어에서 돌덩어리를 의미하는 <돌>이라는 단어는 현대 타밀어에서 <칼>이라고 바뀌었으니, 이 파사돌은 현대 타밀어로 <파사칼>이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허황옥 공주가 가야로 오는 길목에 성난 풍랑을 만나다 다시 본국으로 돌아가 파사돌, 즉 이 석탑을 받아왔다고 널리 알려져있죠. 이 파사석탑은 인도에서 가야로 오는 먼 뱃길을 평온하게 해주었다고 해서 이후 후손들에게는 신비의 돌로 알려져, 어부들이 이 파사석탑을 갈아서 가지고 가거나, 일부를 떼어내서 실제 소지하고 다녔다고 합니다. 그래서 더 이상 훼손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지금은 선조시대부터 돌을 보관하고 있었는데, 원래는 엄청 컸다고 하나, 현재에는 5층으로만 남아있어요.


암튼, 이렇게 겨우 보존된 이 파사탑의 주요 재료인 파사돌. 남인도에서만 생산되는 독특한 자주빛 줄기 모양으로 퇴적된 돌입니다. 이러한 배경지식과 돌의 독특한 모양으로 이 파사석탑의 돌은, 인도에서 온 것이 확실하다는 증거를 가지게 된 셈이지요.







국내김해여행 - 수로왕비릉



우리 이것은 꼭 지키기로 해요. 


위에 첨부된 사진중에서 수로왕비릉에서 바라보는 전경사진 있죠? 그 사진을 자세히 보시면 릉과 정문을 중심으로 길이 3갈래로 나뉘어져있습니다. 그리고 중앙에는 이렇게 <정숙>이라고 적힌 글이 있는데요, <정숙>을 지켜주시는 것만큼 중요한 예절이라면, 3갈래 길 중에서 중앙길은 왕과 왕비가 지나는 전용 길이기 때문에, 어느 유적지를 가시더라도, 이렇게 3갈래 길이 있으면 꼭 양갈래 길로 걸어가셔야해요. 


중앙길은 걷지 않는 것이 예의랍니다 ^0^




국내김해여행 - 수로왕비릉



문화해설사님으로부터 많은 이야기를 듣고 나오게 된 길은 정문이었습니다. 장군차나무가 심어져있는 작은 길인, 뒷길로 들어서서 정문으로 나오면서, 다시 한 번 둘러보게 됩니다. 


사실, 역사적으로 많은 왕과 왕비가 있었지만 허황옥 왕비만큼, 그 사연들이 후대에 많이 내려오는 경우는 흔치 않은 것 같아요. 그만큼 독특한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살아왔던 그녀가 전혀 다른 문화일 수 밖에 없는 타국으로 목숨을 걸고 이동해 자신의 성씨까지 물려주게 되었던 금관가야 최고의 왕비. 단지 이러한 특이한 배경뿐만 아니라, 부부로서의 평등한 관계를 지향하고 그것을 실제 수로왕과 잘 이어갔었다는 점, 그녀가 가지는 독특한 출신 이력을 따진다면, 결국 이주여성들의 마음을 모두 안고 있었던 왕비였다는 점, 그런 그녀의 진취성을 닮은, 딸, 묘견공주는 일본 고대국가를 건설하는데 큰 역할을 합니다. 


그런 그녀의 이름을 딴, <허황옥 평등공로상>은 2005년부터 여성인권 향상과 성차별적 사회문화를 바꾸기 위해서 온갖 수고와 노력을 해온 여성과 단체을 선정하여 그 공을 기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전국 유일의 여성실버 축제였던 <허황옥실버문화축제>도 유일하게 김해에서 4년간 진행하기도 했었죠. 


그리고 여성의 눈으로 본 역사 이야기, 가야인의 영혼을 관통하는 노래와 춤, 해학이 넘치는 <가야여왕, 허황옥>이라는 마당 가무극은 초 저예산임에도 불구하고 문화관광부 평가팀에 의해 양성평등 프로젝트로 전국에서도 유일하게 장관상을 수상받은 작품이기도 합니다. 이 모든 것의 중심에는 <수로왕비, 허황옥>이 있었지요. 김해시에서 여성이라는 이름을 떠올린다면 단연코 가장 먼저 떠오르는 그 이름<허황옥> 비록 지금은 그녀의 릉만이 우리를 반기고 있지만 그 릉에서 문화해설사님과 함께하는 시간은 잠시 그녀의 삶속으로 들어가보는 좋은 기회가 되었습니다.






국내김해여행 - 수로왕비릉




악귀를 물리친다는 홍살문 


능이나 원 혹은 궁궐같은 곳에 있는 홍살문. 하늘에서 오는 악귀를 물리치고 경의를 표시하는 이 홍살문은, 수로왕비릉뿐만 아니라, 수로왕릉에도 있습니다. 이 문을 통과하면 잡귀가 접근하지 못하고 예를 갖출 수 있다니, 이왕이면 이 문을 거치면 좋겠죠? ^^ 비록 구지봉을 거쳐서 뒷쪽으로 입장했기에 처음 입장부터 홍살문을 거치진 않았지만, 마지막은 이 홍살문을 통해서 나오면서 선조들의 마음씀씀이를 한 번 더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오랜 세월이 지나도 그녀를 기억하고, 그녀를 모시고 있는 김해시의 모습을 보면서 독특하지만 흥미로웠고, 흔치 않은 기회였기에 허황옥을 기억하며 수로왕비릉을떠날 수 있었습니다.




728x90
반응형
그리드형

댓글